[누리마루 이야기81] 다시 만나면 기억하겠습니다(1부)

2박 3일간 바라본 평양의 겉과 속

정선호/노무현장학생 2018.11.05 18:06 댓글 (0) 조회 (1,088)

2015년 5월 23일 노무현장학생들이 봉하마을에 모여 이룬 모임 ‘누리마루’는 세상의 리더(Leader)라는 뜻의 순우리말 합성어입니다. ‘누리마루(世宗; NURIMARU)’는 노무현장학생들이 연대하여, 민주주의를 지키는 리더인 ‘깨어있는 시민’으로 성장해나가고자 하는 목표를 지향합니다. 노무현장학생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누리마루 이야기: 노무현장학생 소통 릴레이’를 연재합니다.

2007년 10월 4일, 평양.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4 선언>을 발표했다. 두 정상은 <6·15 선언>을 계승하는 동시에 남북 경제협력 확대와 공동 번영을 위한 보다 높은 단계의 합의에 도달했다. 

 

환희도 잠시. 보수정부의 대북정책은 한반도에 심어진 증오와 미움, 불신과 적대의 질서를 바꾸지 못했다. 11년이 지나서야 다시 만났다. 지난 9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하고, <10·4 선언> 기념행사를 남북이 함께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이 짧은 글은 <10·4 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가 열린 평양의 2박 3일을 담은 기록이다.

 

내가 평양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평양 두 글자를 혀에 올리고 가만히 곱씹었다. 단지 두 글자를 발음한 것뿐인데, 생경했다. 평양. 어쩌면 지구 행성에 존재하는 가장 어색한 지명(地名) 아니던가. 며칠을 뜬 눈으로 보냈다. 자려는 본능조차 사치로 느껴졌다. 

 

첫날, 정부 수송기를 타고 평양공항으로 

통일부는 여러 차례 전화와 문자를 통해 방북 시 준비할 것과 유의할 사항을 세세하게 안내해주었다. 마침내, 10월 4일 목요일. 출발 집결지는 경복궁 동편주차장이었다. 버스를 통해 성남 서울공항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공군 수송기를 통해 순안 평양공항에 도착하는 계획이었다. 

 

부스에서 명단을 확인하고, 북한 방문증명서와 방북기간 내내 패용할 신분증 그리고 태극기 배지를 받았다. 방북단은 총 160명 규모로 정부와 정당, 시민사회와 문화예술인이 폭넓게 포함됐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원혜영 국회의원, 오거돈 부산시장, 지은희 정의기억연대 전 이사장까지 5명이 공동단장을 맡았다. 

 

대학생은 나를 포함해 단 2명이었다. 새벽부터 취재진과 방북단이 섞여 분주했다. 오전 6시 40분, 경찰의 교통통제를 받으며 출발했다. 심장이 뛰었다. 서울공항은 주로 대통령이 해외로 출국할 때 이용하는 곳으로, 공군이 관할하는 기지다. 

 

방북단은 북으로 떠나기 위한 절차를 마치고 활주로로 이동했다. 공군수송기 3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한 녹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철골. 내부 역시 일반 항공기와 완전히 달랐다. 

 

KakaoTalk_Moim_5eEGnxT09Bs6BX3R41j0llnCtm49Pj.jpg

 

1시간이면, 단 1시간이면

1시간이 지났을까. 평양에 도착했다. 저 멀리 인공기가 선명한 고려항공 비행기와 북한 안내원 선생이 보였다. (흔히 알고 있는 ‘동무’나 ‘동지’라는 표현은 체제나 이념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방북단이 북측 관계자를 호칭할 때, 북측 관계자가 방북단을 호칭할 때 모두 ‘선생’이라는 표현을 쓴다. - 글쓴이) 

 

진짜 평양이구나, 싶었다. 평양공항은 김포공항 제1청사의 1/6 수준이지만, 부족한 점은 없다. 잘 구성돼 있고, 먼지 한 톨 없다. 방북단은 평양공항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북측에서 마련한 버스에 탑승했다.

 

탑승한 버스는 12번 버스로, 주로 가수와 배우 등 문화예술인이 탄 차량이었다. 공항은 숙소인 고려호텔이 위치한 평양 시내와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창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방북단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거리마다 코스모스가 활짝 폈다. 들녘은 황금으로 물들어 추수를 앞두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국내에서 시외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거리엔 자전거를 타거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민들이 많았다. 

 

KakaoTalk_Moim_5eEGnxT09Bs6BX3R41j0llnCtmknM5.jpg

 

피와 살을 가진, 북한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에 북에서 ‘주체 최고성지’라고 호명하는 금수산태양궁전이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시신이 살아있을 당시 모습으로 보존돼 있다. 사회주의권 국가 특유의 장엄한 건축양식이 눈에 띈다. 

 

과거엔 남에서 북을 방문하면, 북측은 꼭 이곳을 참배해야 한다고 강조해 몇 번이나 남북관계가 틀어질 뻔 했다. 곧 여명거리가 나오는데, 북한 자본이 집중된 곳이다. 고층 아파트가 즐비해있고, 도로도 굉장히 넓다. 국내 뉴타운 단지를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북한 시민을 보는 일에도 집중했다. 

 

현재 북한에 보급된 휴대폰은 약 580만대. 평양 시민들은 휴대폰을 이용해 자유로이 통화하거나 거리 곳곳에서 버스나 전동차 같은 대중교통 수단을 기다리곤 했다. 오랜 세월 냉전적 이해에 기초한 해석이 대두된 탓일까. 

 

우리는 흔히 북한 사회를 ‘당이 인민 개개인을 매우 강력하게 규율해서, 사람들이 숨조차 쉬지 못하는 곳’으로 생각한다. 파놉티콘처럼 일상적인 감시체제가 가동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직접 바라본 북한 사회는 인민의 자율적인 영역이 완전히 폐쇄된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걷고, 말하고, 숨 쉬는 인간이다.

 

‘배급하는 공산주의 사회’. 북한을 효율적으로 정의하는 문장이다. 그렇지만 평양엔 상점도 많다. 거리마다 ‘청량음료’ 간판을 달고 과자나 음료를 판매하는 컨테이너 형식 상점부터, 조선옷가게, 안경가게, 짜장면 가게와 기념품 판매상점, 야채가게 등이 많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화려한 간판은 아니다. 

 

사람으로 가득한 평양역과 역전백화점, 뉴스 영상과 사진으로만 접하던 김일성 광장을 지나면 고려호텔이다. 고려호텔 직원들이 운집해 박수를 치며 방북단을 맞아주었다. 정겹게 인사를 나눴다. 호텔은 넓고 깨끗하며, 숙소도 잘 정돈돼 있었다. 

 

TV를 통해선 조선중앙방송과 일본 NHK, 중국 CCTV부터 알자지라까지 외국의 주요 방송 채널을 볼 수 있었다. 숙소엔 거대한 창이 있는데, 그곳에서 본 평양 시내는 그저 푸르고 맑았다.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미래를 담보하라’

호텔 연회장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첫 방문지 과학기술전당으로 향했다. 김정은 시대의 주요 슬로건인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미래를 담보하라’에 적합한 장소로, 16년 1월 준공됐다. 북측 안내원 선생은 ‘평양 시민들이 찾아와 과학을 학습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로비엔 미래도시를 배경으로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활짝 웃고 있는 그림이 걸려있다. 평양의 주요 건물엔 두 부자 사진이 빠짐없다. 내부는 컴퓨터와 도서, 전시공간으로 빼곡했다. 인터넷도 되냐는 질문에 안내원 선생은 ‘모든 학습 자료가 내장돼 있어서 인터넷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이곳엔 어린이를 위한 별도의 놀이공간이 있다. 중고등학생 나이로 보이는 북측 사람들은 방북단을 향해 묘한 경계를 내뿜었지만, 어린이들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소리 지르며 놀았고 우리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수많은 ‘어린이’를 생각했다. 

 

한반도의 폭력적 냉전질서 속에서 성장하고 죽울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증오를 학습했을까. 나는 그저 심장이 아팠다. 이후엔 평양대극장으로 이동해 평양 시민들과 북측 예술단 공연을 관람했다. 대부분 우리 모두가 알 수 있는 남측 대중가요였다. 북측의 배려가 느껴졌다. 

 

마지막 곡인 ‘우리 다시 만납시다’를 다 같이 불렀는데, 평양 시민들 눈가가 뜨거워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방북단을 향해 ‘다시 만나자’고 말하면서 펑펑 우는 북한 시민들.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혀는 무거웠고, 입을 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만찬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긴장한 탓이었을까. 바로 잠에 들었다.

 

KakaoTalk_Moim_5eEGnxT09Bs6BX3R41j0llnCtmgg1j.jpg

 

둘째 날, 판이 바뀌고 있다

아침이 밝았다. 창문을 열어 평양의 아침공기를 맡았다. 달고 시큰했다. <10·4선언 발표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가 열릴 인민문화궁전으로 향했다. 방북단이 도착했을 때, 3000석 규모의 대회장엔 많은 평양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북측에서 헌법 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의장부터 리선권 조평통 위원장 등 주요 인사가 단상에 올랐다. 행사는 연설 위주로 이뤄졌는데, 특기할 사항은 북한이 비핵화와 평화체제 정착을 매우 공인된 노선으로 강조했다는 점이다. 

 

북한 최고지도자를 호명할 때도 웅장한 수사를 동원해 꾸미지 않고 ‘북남수뇌’로만 불렀다. 시대가, 판이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옥류관’으로 향했다. 대동강변에 위치한 옥류관은 1960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평양냉면과 녹두지짐을 함께 먹었다. 국내에서 먹어본 평양냉면과는 완전히 달랐다. 육수를 먹고,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것 같아 당황했다. 

 

다시 육수를 맛보니, 그제야 진한 육향이 올라왔다. 면 역시 통념과 다르게 쉽게 끊어지지 않고 쫄깃했다. 평양냉면은 두 가지 맛으로 즐기는데, 처음엔 아무 것도 넣지 않고 육수와 면의 맛을 본다. 그 다음으로 육수에 식초와 고춧가루를 넣어 즐긴다. 계속 생각나는, 일미(一味)다. 북측 접객원 선생은 내게 “다시 오세요. 다시 만나면 꼭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옥류관을 나오며 다만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KakaoTalk_Moim_5eEGnxT09Bs6BX3R41j0llnCtms5bj.jpg

 

다음으로 만수대창작사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찾았다. 만수대창작사는 북한의 주요 선전물과 동상, 기념물 등을 창작·제작하는 ‘예술기지’다. 다른 사회주의권 국가로부터 기념물을 주문받아 제작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인민예술가의 작품을 많이 보았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역시 거대하다. 안내원 선생 말에 따르면 ‘평양의 청소년들이 누구나 찾아와 예체능을 학습하는 곳’이라고 한다. 하루 평균 5000여명의 학생들이 찾는데, 그 기량이 상당했다. 마지막 행사,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관람할 ‘빛나는 조국’ 관람을 앞두고 평양의 태양이 저물어갔다. 


(2부에 계속)

SNS 공유 1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 밴드 라인
첨부파일 0

스크랩 스크랩

목록

행사신청하기

회원정보를 정확히 확인 후 입력해 주세요. 행사 신청시 기본 회원정보도 함께 변경됩니다.

기본회원정보

기본회원정보

참가인원정보

참가인원정보

  • 총참가인원수

    취소 확인 수정

    닫기

     

    행사를
    신청하시겠습니까?

    취소 확인

    닫기

     

    닫기

     

    행사 신청을 [취소]하시겠습니까?

    취소 확인

    닫기

     

    행사를
    수정하시겠습니까?

    취소 확인

    닫기

    닫기